“ 내가 귀하에게 배울 것이 있겠는가? ”

<aside> <img src="/icons/microphone_yellow.svg" alt="/icons/microphone_yellow.svg" width="40px" /> *“추측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능력으로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겁니까?” ”해내야 합니다. 추측이라는 표현으로 도피하기엔 모든 지표가 너무나 명확하니까요.”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적어도 이천 년이라니⋯ 만약 우리가 그를 설득하지 못한다면요?” ”한 가지 확인합시다. UGN의 목적이 무엇이죠?” ”레니게이드로부터 세계를 수호하고 인류와 오버드의 공존에 힘쓰는 것입니다.” ”답이 나왔군요. 우리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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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월 ▒일 23시 17분, 중화민국 모 지역의 UGN 지부 소속 에이전트가 인적 드문 산중에서 강력한 레니게이드 방출, 즉 워딩 반응을 감지했다. 지부에서 테러 공작을 예상하고 주요 인력 전원을 모아 현장을 수색한 결과 한 명의 오버드가 발견되었다. 흙과 바위, 나무 뿌리가 얼키고설켜 숨겨져 있던 공동에 사람이 잠들어있었던 것이다. 그는 우려와 경계 속에서 눈을 떴고, 십수 명의 에이전트를 말없이 둘러보았다.

그게 전부였다. 수상한 장소에서 뜬금없이 발견된 것치고 이 정체불명의 오버드는 대단히 점잖은 인물이었다. 순순히 UGN을 따라왔고 각종 검사에 응했다. 힘을 과시하길 원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이 대화에 의해 진행된다는 사실을 흡족하게 여기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결함이 있었는데, 바로 제대로 된 기억이 없었다는 점이다. UGN은 그에게 많은 질문을 했지만 대부분의 의문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 출신, 신드롬—신드롬이 무엇이냐고까지 물었다—은 물론 레니게이드에 대한 상식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수많은 질문에 그가 답한 것은 단 두 가지였다: 어째서 기억이 없는지, 얼굴에 난 몇 줄이나 되는 흉터는 어쩌다 생긴 것인지.

첫 번째로, 그는 자신이 잠들기 전 스스로 기억을 지웠다.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그가 노이만 신드롬의 보유자임이 밝혀지면서 모두가 잠자코 수긍했다. 대사 활동을 제어하거나 초월적인 기억력을 발휘하는 것도 가능하니, 스스로 잊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유에 대해서는 ‘잊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잊었다’ 는 다소 모호한 답을 내놓았다.

두 번째로, 얼굴의 흉터는 자신의 ‘제자’가 만든 것이다. 이후 이것을 치유하여 지우지 않고 ‘보존’한 것은 본인이 의도한 바이며,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잊지 않았다’고도. 이는 그가 한때 누군가에게 사사받고 가르침을 내리는 위치에 있었다는 뜻이지만 무엇을 가르쳤는지, 어째서 제자와 피를 흘릴 만큼 험악한 관계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끄트머리에 달할 수록 희게 바래어 가는 검고 긴 머리칼, 안개가 낀 듯 탁하고 흐린 금색 눈, 차분하다 못해 나른해 뵈는 얼굴. 훤칠한 키와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단련된 육체. 일견 마흔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지만 말씨에 예스러운 데가 있고 행동거지나 표정에도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있으니 대하다 보면 젊은이와 노인을 한 몸에 뒤섞어 놓은 듯 기묘하게 느껴진다.